소도시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 씨. 6개월
전부터 식당 매출이 줄면서 직원 월급을 걱정할 정도로 상황이 어려워졌다. 그러다가 손님에게 악성 민원을
받은 후로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수시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시작됐다.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명치가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럴 때는 식당 일을 할 수 없어 아내에게 일을 맡겨 두다 보니, 집 안에서 꼼짝 않고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았다. 결국 김 씨는 가까운
정신과 의원을 찾아 심리 검사와 30분 가량 면담을 한 뒤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김 씨는 우울감, 무의욕, 불안 증상을 줄여주는 항우울제와 불면증을 개선하는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진료실에서
의사에게 약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뒤돌아 나오니 미처 묻지 못했던 질문이 많았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첫날 약을 먹자 잠은 그런대로 잘 수 있었지만 아침에 정신이 몽롱해서 일을 나가기 힘들었다. 2주 간격으로
병원에 가면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난감했다.
그렇게 10분 남짓의 진료를 마치고 약을 처방은
김 씨는 현재 겪고 있는 우울감이 원래 가지고 있던 예민한 기질과 함께 만성적으로 쌓인 가족과의 갈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근본적인 상담 치료를 받고 싶었지만 소도시에서 그런 정신 치료를 하는 곳을 찾기란 어려웠다. 시시때때로 숨이 안 쉬어지는 불안 발작이 찾아올 때에는 이게 응급실에 가야 하는 상태인지,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현재 정신과 진료는 여러 한계를 갖고 있다. 첫째, 치료의 근간이 되는 상담을 통한 정신 치료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우울증, 불면증 등 상당수의 정신 질환은 치료 지침에서도 정신사회적 치료를 약물 치료만큼
중요한 치료로 권고하고 있다. 그렇지만 환자 한 명에게 50분을
심도 있게 면담하더라도 의사가 받는 수가는 같은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경락 마사지나 개인 운동지도(PT) 등의 1대 1 서비스가 받는 금액에 미치지 못한다. 결국 정신사회적 치료의 낮은 수가는 상대적으로 약물 치료 의존도를 높인다. 이는
약물의 남용과 부작용 위험을 증가시킨다.
둘째, 증상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인
도구가 거의 없다. 정신과에서 진찰은 혈액 검사나 엑스레이 촬영 대신 대부분 설문 형태의 심리 검사와
의사 면담으로 이뤄진다. 첫 진단 뿐 아니라 이후 이어지는 치료 경과를 살필 때에도 병세의 호전 여부를
객관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도구가 없다.
디지털 치료제는 현재 정신과 의료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한계에서 태생했다. 디지털 치료제란 질병을 치료하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디지털 치료제가
어떻게 질병을 치료한다는 것일까.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증상 개선을 위해 환자가 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잘 지킬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술을 갈망할 때 앱의 ‘SOS’ 버튼을 터치하면
특정 영상이 나타나 다른 생각으로 전환하게끔 하거나, 폭식증 환자가 프로그램에 식사를 규칙적으로 기록하면
식단을 코칭해 주는 예가 그것이다.
둘째, 특정 훈련을 반복해 인지 기능을 개선하는
재활 훈련이다. 치매 환자를 위한 기억력 훈련 게임이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아동들을 위한 집중력 향상 게임이 그 예다. 마지막으로, 환자와 치료자의 면담으로 이루어지던 정신 치료를 앱이 대신하는 것도 가능하다. 소프트웨어가 의사의 정신 치료를 대체할 수는 없어도 보조 의료 도구로서, 항상 환자 손
안에서 실시간으로 중재하는 기능을 함으로써 치료적 효과를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정신과에서 활용도가 높다 보니, 실제로
국내외에서 개발되고 있는 디지털 치료제의 절반가량이 정신 질환을 대상으로 한 제품이다. 2017년 약물
중독 증상을 치료하는 ‘리셋(Reset)’이라는 앱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승인을 받은 것을 필두로, 현재 미국에서는 10여 개의 제품이 승인을 받았고, 독일에서도 임시 등재 제품을 포함해 30여 개가 처방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현재 9개 제품이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기 위한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빠르면 연내 허가 받은 제품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9개 중 6개 제품이 불면증, 불안장애, 알코올 중독, 니코틴 중독,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약 대신 앱을 처방받는 날이 머지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디지털 치료제를 활용하면, 앞서 언급한
여러 현안들을 해결할 수 있다. 김씨는 디지털 치료제를 통해 지방 소도시에서도 합리적인 비용으로 검증된
정신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불안 발작이 올 땐, 바로
앱에서 이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안정제를 먹지 않아도 스스로 진정할 수 있다. 한편, 의사도 김씨의 일일 활동량, 기분 점수 변화, 스트레스 지수 등을 데이터로 확인하면서 증상의 경과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몇 가지 남은 과제가 있다. 디지털 치료제를 실제 임상 현장에서 잘 쓰이려면 의료기기로서의 품목 허가뿐 아니라 기존 치료와 동등한 수준의
효과성, 안전성, 경제성을 입증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결정하는 수가에 등재될 수 있다. 문제는
기존 의약품과 하드웨어 의료 기기에 맞춰진 평가 시스템으로는 새로운 방식의 치료를 검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와 의사들도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한, 환자 스스로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 편의성의 문제, 민감한
개인의 의료 기록을 보호하기 위한 개인정보보호의 문제도 계속 풀어가야 할 숙제이다.